이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모 서점노조 창립기념식 자리, 매장 한 가운데 통로에 조합원들이 줄지어 서 있고 앞 쪽에는 단상과 내빈용 의자. 내빈이라고 나는 한 시간 내내 앉아 있었다. 노조 위원장의 기념사, 사장의 축사, 상급단체의 격려사, 이웃 노조의 연대사, 모범 조합원 표창···. 내내 낯이 화끈거렸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조합원들을 노동조합 생일날조차 서서 행사를 치르게 하다니 이 또한 폭력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야만은 우리 가까이 일상과 함께 있다. ‘빨리 좀 끝내주지, 말 좀 짧게 했으면.’ 내가 그 자리 조합원이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백 번도 더 했을 터이다.

연말이라 송년회며 시상식이며 각종 행사가 하루건너 있다. 가고 싶지 않아도 꼭 가야 할 자리도 여럿이다. 일종의 의무방어전인데 그런 자리에 가면서 늘 바라는 게 있다. 인사말이며 기념사 축사 격려사 등을 들어야만 하는데 제발이지 의미 있는 얘기를 들었으면 하는 거다. 짧고 강렬하며 유머까지 곁들인다면 참으로 더할 나위가 없겠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단상(壇上)에 오르는 분들은 제발 짧게 얘기하시라. 3분이면 충분하고 최악의 경우라도 5분을 넘기지 마시길. 정말이지 최악은, ‘마지막으로 끝으로’를 말해놓고 중언부언 하는 것이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짧게 하겠다’고 해놓고선 첫째 둘째 셋째 어쩌고 하며 늘어지는 것도 단하(壇下)에 있는 사람들 고문하는 거다.

기자회견이며 집회도 마찬가지다. 발언하는 사람들은 그 날의 주제에 대해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해야 한다. 시민단체 기자회견의 경우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게 하는데 각각의 사람들이 특색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 말에 그 말이라면 써주고 싶어도 쓰기 싫은 것이다. 대회사나 대표 발언을 하는 분들은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고 성의다. 토론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토론자당 몇 분의 시간 안에 얘기해달라고 사회자가 요청을 한다. 내가 본 어떤 토론자의 경우 시간도 배로 사용하고 내용은 주제와 아무런 관련 없는 얘기로 시종일관했다. 토론회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건 발표자와 다른 토론자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주제에 충실하고 시간을 지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회의 시간에 혼자 말 많이 하는 사람도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다. 사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발언을 독점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들은 모임을 망치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나는 아직 단상에 오를 연배도 아니고 위치에 있지도 않은데 두어 번 단상에 오른 적이 있다. 큰 아이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부모 대표로 나가서는 딱 한 마디 했다. ‘졸업생 여러분, 축하합니다.’ 성년식 행사 때도 한 마디로 말했다. ‘○○○ 씨, 어른이 된 걸 축하합니다.’ 교장이나 이사장이 충분히 얘기를 했는데 나까지 길게 한다면 젊은 청춘들에게 얼마나 결례이겠는가. 졸업식 끝나고 총학생회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아저씨, 오늘 최고였어요.” 극단적인 경우지만 이런 축사도 있는 것이다.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이다.

가능한 짧게 말하시라. 그 어떤 행사든 그 날의 대회사(기념사)를 들으면 그 단체나 행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면 최상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니 이런 글도 쓴다. 내가 보고 들은 바로는 3분 안에 말하면 최소한 행사를 망치진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시상식에 갔다가 느낀 소회를 말한 적이 있다. “제발, 상만 주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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