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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클라리넷 소나타 Eb장조 : 브람스의 달콤한 열매, ‘알레그로 아마빌레’[클래식 비타민 (7)] 〈이채훈 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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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1.0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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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슈만(1819~1896)은 40년 동안 브람스(1833~1897)의 음악적 연인이자 소울메이트였지요. 브람스가 슈만의 집을 방문해서 갓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해 보인 건 1853년 10월, 낙엽 지던 가을이었습니다. 브람스는 20살, 클라라는 34살…. 나이차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클라라는 이미 유럽을 주름잡고 있던 피아니스트로, 젊은 브람스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의 커리어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브람스가 걸어간 인생길에 여러 여성이 교차했지만 40년 넘도록 한결같이 존중하고 아낀 사람은 클라라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브람스 음악은 투박한 껍질 안에 가장 달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가장 깊게 얽힌 곡은 아마도 1885년 작곡한 교향곡 4번 E단조일 것입니다. 고독과 우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의 달콤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클라라 슈만이었을 것입니다.

평생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살다 간 브람스는 교향곡 4번에서 완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앞의 교향곡들에서 베토벤의 후계자로 평가받은 브람스는 50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에야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베토벤 교향곡의 이념과 완전히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향곡 4번에서 피날레마저 캄캄한 파사칼리아로 덮어놓았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4번 E단조 Op.98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빈 필하모닉)
▶ https://youtu.be/wxB5vkZy7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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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는 이 곡을 작곡한 오스트리아 산골 뮈르츠추슐라크에서 말했지요. “이 작품이 기후 영향을 받는 게 아닌지 두렵네. 여기서 생산되는 버찌는 결코 단맛을 내는 법이 없어.” 브람스는 아침마다 아주 진하고 독한 블랙커피를 마셨는데, 이 교향곡 또한 쓰디쓴 커피 맛을 닮은 것 같군요. 그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무뚝뚝한 태도와 엉뚱한 언행으로 가린 채 살았습니다. 이 투박한 껍질은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요.

그는 평생 클라라를 사랑했지만, 이성으로서 다가서지 못하고 내면으로 움츠러들 뿐이었습니다. 클라라 또한 브람스를 소중히 여기며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내가 살 수 있고 고갈되지 않는 음악의 샘을 맛볼 수 있는 정신적 사랑이었다고 할까요.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낙엽이 뒹굴던 1895년 10월 아침, 브람스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인터메조를 연주했고, 브람스는 묵묵히 들었습니다. 77세 할머니가 된 클라라, 63세 초로의 브람스…. 두 사람은 지난 세월을 되새기며 힘없는 미소를 나누었습니다. 이듬해 5월,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브람스는 프랑크푸르트로 서둘러 출발했지만 그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지요. 이미 숨이 멎은 그녀를 보며 브람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녀가 떠나는 길에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장례가 끝난 뒤 브람스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을 묻었다네.”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는 4번 교향곡 자필 악보 1악장의 첫머리, ‘BG---EC---’ 음표 아래에 “오, 죽음이여, 죽음이여”라고 써넣었습니다. 이 곡을 클라라의 죽음에 바치고 싶었던 걸까요? 그는 비탄에 젖어 말했습니다. “이렇게 고독한데,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브람스는 클라라가 눈을 감은 이듬해, 1897년 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라라가 ‘투박한 껍질’이라 부른 브람스 음악의 겉모습은 무엇일까요? 무겁고 둔탁한 화성, 절둑거리는 리듬, 고집스레 내면을 향하는 정서…. 이 때문에 그의 음악은 편안하게 다가서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커피 인이 박여야 커피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코프스키는 브람스의 위대성을 인정했지만, 자신은 브람스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지요. 차이코프스키 같은 천재도 브람스의 투박한 껍질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 같군요.

브람스 음악 중에는 달콤한 열매가 겉에 드러나 있는 곡도 있습니다. 클라라가 아직 살아 있던 1894년에 작곡한 클라리넷 소나타 Eb장조가 그런 경우입니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은 뒤에는 ‘네 개의 심각한 노래’, ‘11개의 코랄 전주곡’ 이외에는 작품을 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클라리넷 소나타는 브람스의 마지막 작품이 될 뻔한 곡이지요. 1악장에는 ‘알레그로 아마빌레’, 곧 ‘빠르고 정답게’라는 지시어가 적혀 있습니다. 클라리넷의 달콤한 음색이 피아노 소리와 어우러지는 이 곡은 부드럽고 따뜻한 브람스의 속마음을 처음부터 드러내 보입니다.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 2번 Eb장조 1악장 ‘알레그로 아마빌레’
▶https://youtu.be/CdbXg5SBU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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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그로 아마빌레’란 지시어가 써 있는 곡이 하나 더 있지요.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의 첫 악장입니다. 이 곡 또한 달콤한 열매가 겉에 드러나 있는 경우입니다. 이 가을, 브람스가 멀게 느껴지는 분은 공원의 벤치에 누워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알레그로 아마빌레’에 잠시 마음을 맡겨 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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