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가 기쁜 소식을 가져 왔어도 조선일보의 관심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6월 21일자 사설(「“북핵 위기 끝났다”?」)은 “북한 핵문제가 카터 방북 이후 달라진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낭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구심을 갖는 것도 바로 정상회담의 분위기에 핵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걱정했다. 김일성의 전략에 말려들어 실속 없는 정상 대좌만 갖고 북에 핵 개발의 여유만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일보에는 남북 정상회담에 관한 부정적 기사들이 잇달아 나왔다. “북한과 김일성 북한 주석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이번 북한 방문으로 유엔의 대북한 제재를 사실상 늦출 수 있게 함으로써 이번 방문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동경의 외교관들과 전문가들이 말했다”, “북한이 반드시 서울에서 하자고 해 김일성이 서울에 등장하는 상황을 우리 정부가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떠오르고, 평양에서 할 경우에도 우리 내부에선 비판적인 여론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 등의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북은 조용한데 남은 왜 야단인가」(6월 22일자),「서울·평양은 피해야」(27일자), 「북에 가는 한총련」(28일자), 「북측 뜻대로 되나」(29자) 등 남북관계 기선 시도를 헐뜯는 사설을 잇달아 내보냈다.

그럼에도 남북한은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을 갖고 김영삼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3일 동안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30일자 사회면 배꼽기사(“김일성 속셈 조심하세요” / PC통신에 비친 정상회담 / “좋은 결실 맺어달라” 환영 분위기 / “민감한 의제 피해야” 신중론 우세」) 통해 ‘민심’을 전달했다.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

한반도가 찜통이던 1994년 7월 초, 남북은 정상회담 준비로 바빴다. 김일성은 7일 김영삼이 묵게 될 묘향산 초대소로 향했다. 침실과 욕실은 물론 심지어 냉장고에 광천수를 충분히 넣어 두었는가를 직접 확인했다. 정상회담 준비로 며칠 동안 과로를 한 그는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얼마 후 그는 심장발작으로 쓰러졌다. 8일 새벽 2시 그의 사망이 확인됐다.

김일성의 사망은 34시간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9일 낮 12시에 비로소 북한 중앙방송을 통해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일보는 10일자에 그 소식을 보도했다. 1면의  통단 머리기사(「김일성 사망 / ‘49년 1인 독재’ 사라지다/ 김정일 승계 시사」)를 비롯해 김일성 사망에 관한 기사들이 2~13면, 25~27면을 도배질했다.

조선일보 북경 특파원이 보낸 3면 기사(「평양시민들 집단 히스테리 / 충격·당황 땅에 주저앉아 울부짖어 / 만수대 동상 부근 10만여 조문 행렬/ 지방도시 평온한 편 이상 징후 없어 / 특별방송 5차례 예고/ 김정일 모습은 안보여)는 북한의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9일 낮 12시 김일성주석의 사망소식을 들은 평양주민들은 대부분 소식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으며, 일부 주민들은 평양시내 만수대의 김 주석 동상 앞으로 달려가 울기 시작했다고 평양에 주재하는 중국 소식통들이 전했다. 평양 주재 중국 소식통들은 조선일보 북경지국과의 전화 통화에서 현재 많은 평양사람들이 슬픈 분위기에 잠겨 있으며, 대부분 김 주석의 사망을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평양시내 중심부에 있는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 주위에는 10만 명이 넘는 평양시민들이 몰려들어 자정까지 흩어지지 않고 김일성을 추도하고 있다고 평양의 중국 소식통들이 전했다. 평양의 중국 소식통들은 평양시민들이 만수대 주위와 만수대에서 조선혁명 박물관 앞의 김일성 광장에 이르는 길이 5백m의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고 전했다. 평양에서 방영되는 평양TV는 밤 10시까지 방영되던 평소의 전례를 깨고 밤 12시까지 방송시간을 연장하며 김일성을 찬양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고 이 소식통들은 전했다.

27면(사회면)이 전한 남한 분위기는 제목(「“김일성 죽었다” 흥분·불안 / “속 후련하다” 환성 시민도 / 정상회담 앞두고 죽어서 좀 아쉽다 / 김정일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걱정 / 침착하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 냉면집 실향민들 몰려 축하주 들어」)부터 사뭇 다르다.

같은 날짜 사설(「해방감과 불안감」)은 더욱 노골적이다.

북한 주석 김일성의 사망은 (…) 우리 민족의 흐름을 터주는 것이며 (…) 김일성은 우리에게 있어 악몽과 같은 존재였다. 조국의 분단의 원인은 사실상 그에게 있다. (…) 그는 무엇보다도 같은 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2백만 명 이상을 죽게 한 민족의 죄인이다. 그는 수많은 정적을 숙청했고 지금도 김일성 유일체제에 회의를 가진 수십만을 투옥하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해왔다. 그는 역사를 왜곡해서 인민을 기만했으며 세습왕조를 세워 우리 민족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민족의 역사가 무엇보다도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2천5백만 북한 인민의 눈과 귀와 입을 닫게 하고 그들을 굶주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한 것보다 더 큰 지도자의 죄는 없다.
(…) 그의 사망은 우리를 어떤 속박에서 해방시킴과 동시에 우리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 북의 정세가 경화되고 호전적인 방향으로 가면 우리는 어쩌면 김일성 생전보다 더 위험한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북의 상황이 보다 타협적이고 공존적이며 중국화로 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의 모든 통로를 북의 방향이 감지될 때까지 일단 봉쇄는 하지 않되 교류는 유보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정부의 성명에 우리의 지향적 견해는 없고 단지 경계 태세만을 언급한 것은 너무도 사려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일단 더욱 더 폐쇄적이고 보다 더 우리식 사회주의로 응고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 크게 볼 때 북에는 김의 공백을 메울 능력이 없다. (…) 북을 붙잡고 갈 중심세력의 부재는 궁극적으로 북의 쇠운을 재촉할 것이다. (…)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 민족 전체가, 한반도 전부가 승운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예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적어도 역사의 한 막을 어떻게 슬기롭게 이용하고 대처하느냐는 우리의 능력이 검증되기까지는 그렇다.

「무너진 우상」이란 제목의 ‘기자수첩’은 김일성을 ‘현대판 진시황’으로까지 표현했다.

독재자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예비한다. 죄업이 깊을수록 공훈으로 묘비명을 가득 채워 역사의 보복을 피해보려고 한다. 김일성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의 관 뚜껑에 못이 박히는 순간부터 다시쓰여 지기 시작하는 역사, 그 심판에서 자신은 예외가 될 수 있다고 믿고, 그걸 위해 몸부림쳤던 어리석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한 어리석은 인간, 그러나 그 어리석음과 집착과 미망이 한 민족사를 피로 얼룩지게 했던 인간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보내면서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건지려고 한다. 그것은 역사의 섭리를 인공의 방파제로 막아보려 했던 한 독재자의 죽음처럼, 통일은 그렇게 돌연히 우리를 방문하기 위해 저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김일성 49년’을 평가하는 기사(「빈곤만 남은 우상국가의 절대 교주」)도 「민족 비극 씨앗 뿌린 ‘6·25 전범’ / 미제 축출 내세워 국가를 병영화 / 반  대파 피의 숙청 반세기 신 군림 / 세계 최악 인권 유린·테러국 오명」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밖의 기사들도〈「반 김정일 쿠데타 가능성 WP보도 / 주민 지지 의문 탈주 사태도 예상」「“김일성 독살 가능성” 주장- 북 타도 운동 재일 박갑동 씨」「권력 승계 확실 김정일 누구인가 / 충동적 성격의 영화광 / 42년 소련 출생 8세 때 생모 김정숙 잃어 / 74년 후계자 확정 후 반대파 대거 숙청 / 측근에 오만하고 실수 인정 안 해/ 화나면 상대방에 권총 겨누기도」 등 부정적인 제목 일색이었다.

조선일보 7월 11일자 사설(「왜 김 주석 인가」)은 바로 전날 자기 신문의 일부 기사에도 ‘주석’이란 호칭이 나왔는데도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끊임없이 진행된 텔레비전 방송 보도에서는 김일성 북한주석이라는 호칭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너무 많이 나왔다. 어떤 때는 김 주석이라고 하기도 했다. 일부 논평가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 가치관이 전도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오늘의 대명천지에서 상상도 못할 폭군, 북한을 가장 어둡고 괴로운 지역으로 만든 장본인을 칭송하는 말을 무심코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조문 정국’

미국 대통령 클린턴 김일성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애도의 뜻를 표시했으나, 공화당 상원의원 밥 돌은 즉각 클린턴의 그런 행동이 “적절치 않다”고 비난했다.

7월 11일 국회 외무통일위에서 이부영 등 민주당 의원들은 김일성의 장례식에 정부가 조문사절단을 보내자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그날 최고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고 “정부 조치를 주시하기로 했다”는 결론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김랑기는 “2백만의 동족을 처참하게 죽게 한 김일성의 관 앞에서 정부 대표로 하여금 공식으로 머리를 숙이게 하자는 발상이, 설사 전술적 차원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호네커라면 참으로 부러워했을 난센스”라고 비판했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헌정회는 11일 ‘김일성 사망 시국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통해 “북의 대남 전략에 일대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일성 사망을 애도하는 정서를 부추기는 세력은 용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스멀스멀 조문 정국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7월 13일자 사설(「조문 의원들의 경우」)을 통해 조문사절단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정신 빠진 소리를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같은 날짜 제2사설(「정체성의 위기인가」)은 아래와 같이 ‘개탄’했다.

김일성 사망 후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사회 일각의 반응은 우리가 일종의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있음을 실감케 한다. (···) 우리는 46년 전에 공산 치하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모여 대한민국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 김일성이 사망하자 일부에서는 조문사절을 운운하는가 하면, 김이 마치 화해의 물꼬를 우리보다 먼저 선창해서 트려고 하다가 안타깝게 사망했다는 양 앞뒤를 바꾸어서 애도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서는 일체의 정당한 비판도 자제해야 한다는 식의 자아상실증마저 지도층 사이에까지 번지고 있는 느낌이다.

같은 날짜 ‘기자수첩’(「속 조문사절론」)은 다음과 같이 맹공을 퍼부었다.

조문사절론이 민주당의 당론이 아니라지만 최소한 국회의 3개 상임위에서 6명 이상의 의원이 이를 거론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민주당과 의원들이 조문단 파견 발언이 뭐 그리 큰 문제냐며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 트집이라 반격하고 있다. (···) 그러면 김일성 조문론은 한낱 트집거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오히려 동시다발적인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 국민들의 시각일 것이다. 민주당이나 의원들은 공당이고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다. 더욱이 조문론을 거론한 인사들은 지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집권의 기회를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던 언필칭 집권대체세력의 주력들이다. 그들이 주체사상을 콧잔등에 바르고 다니면서 어른들의 속을 썩이는 일부 철없는 풋내기 학생들과 동렬에 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정치인에겐 책임이 따른다. 긴말 할 것 없이 다음 국회의원선거에서 “나는 김일성이 죽었을 때 조문사절을 보내자고 주장했다. 우리가 집권하면 그런 식으로 할 것이다”라면서 당당하게 표를 달라고 할 것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집권 민자당이 조문사절 파견 발언을 정치 쟁점화하고 대학가에 김일성을 추모하는 내용의 대자보들이 잇따라 나붙으면서 논란은 더욱 증폭돼 갔다.
조문사절단 발언을 한 의원들과는 별개로 민주당은 당의 입장을 세 가지로 정리해 발표하면서 발을 빼려 했다. 첫째는 김일성의 사망에 대한 조의나 조문사절 파견은 현 시점에서 논할 성격이 아니며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발언의원들의 진의는 김일성 개인에 대한 애도의 표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북 간 신뢰 구축과 민족 화해의 길로 가자는 뜻과,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와 김정일을 탐색하러 가자는 뜻에 있다는 것이란 해명이었다. 셋째로는 발언한 의원들의 진의가 이러함에도 마치 김일성 개인에 대한 애도로 몰아붙이는 민자당의 태도에는 엄중 항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7월 15일 현재 22개 대학에서 ‘김일성 추모 대자보’가 발견됐다. 북한은 남조선 방문단의 방북을 허용하겠다고 나서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검찰은 추모 성명을 발표한 4개 재야단체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박홍의 매카시 행세와 ‘신 공안 정국’

조문 파동은 더욱 격화돼 북한 조평통이 대남 “조문 환영” 성명을 냈고, 전남대에서는 김일성 분향소가 발견됐다. 무공수훈자회·해병전우회·기독교 청년협 등 우익단체들은 “김일성 애도 세력 축출하라”는 규탄 성명을 발표했고, 상이군경 20명이 이부영 의원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온 나라에 난리가 난 듯했다.

조문 파동이 한창인 가운데 서강대 총장 박홍이 7월 18일 대통령과 전국 14개 대학 총장의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 “학생 운동권 배후에 사노맹, 사노총, 김정일이 있다. 그들은 북한 노동신문이나 팩시밀리를 통해 지령을 받는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조선일보는 19일자 1면 머리에 「좌경학생 단호 조치 / 김 대통령: 낡은 이념 맹종 관용에 한계」제목으로 청와대 회동을 보도하면서 박홍이 “북한에서서 미군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지시했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2면에 나온 박홍의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부 학생들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입니다. 그 학생들은 완전히 김정일 장악 하에 있습니다.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돼 있습니다.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북경에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남한 학생들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호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학생들이 잘못하고 있는데도 잘못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학생들에게 편승해서 인기나 얻으려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다음 학기가 되면 학생들은 다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북에서 이미 다 지시를 했습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습니다. 재야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북의 눈치만 보면서 행동하는 파가 있고 다양합니다. 학생들은 팩스를 통해 지시를 직접 받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즉각 박홍에게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7월 20일자 사설(「김정일의 직접 지도」)에서 “한마디로 운동권의 주도권은 NL(민족해방)계가 쥐고 있고, NL의 주도권은 주사파가 잡고 있다. 그리고 주사파는 범청학련 및 범민련 등 남북 주사파 통합조직을 매개로 해서 조선노동당 대남 담당자들의 직접적인 관장 하에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면서 “이 점은 박홍 서강대 총장의 증거가 있다는 주장으로도 뒷받침 된다”라고 단정했다. 증거가 무엇인지 보기도 전에 ”증거가 있다“는 박홍의 주장 자체가 증거라는 괴상한 논리인 것이다.

조선일보 등 수구신문들은 박홍 키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조선일보는 7월 21일자 사설(「용기 있는 지식인의 할 일」)에서 “박홍 총장은 용기 있는 지성인 역할을 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대학사회를 휩쓸었을 시절에 양식 있는 행동을 했던 그는 이제 민주화 실천기의 우리 사회를 파괴하려고 광분하는 주사파 운동권의 정체를 과감히 폭로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고 극찬하면서 “그렇지만 그의 용기는 지금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북한의 김일성을 흠모하는 주체사상파라고 하는 운동권은 지금 자신들이 북한의 지도노선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강변하면서 증거를 대라며 박홍 총장을 몰아세우면서 총장 해임 운동이다, 고발이다 하며 심지어 그의 신변을 괴롭히기도 한다”고 개탄했다.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 몇 명이 박홍 지지성명을 내자 조선일보는 7월 22일자 1면 머리에 「박 총장 발언 지지 성명/ “일부 재야·학생이 왜곡 침묵 못해: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 일동」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5면 전체를 털어 「박홍 총장 용기…사회가 보호하자 / 어른들이 할 말을 당당하게 해야 할 때다」라는 기사 밑에 함께 ‘유력 인사들’의 의견을 모은 캠페인성 기사와 함께 「끌려 다니는 지식인 / 뒷북만 치는 정부」라는 작가 김원우의 시론을 실었다. 홍남순, 김지하, 김주영 등 동원된 인사들은 “증거 요구는 공산당 모르는 소리” “주체사상 낡고 모순 덩어리 이념” “학생운동 국민 정서·관용 한계 크게 벗어나”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7월 23자 1면에도 「20여개 대 총장들 “박 총장 발언 지지”」라는 기사가 주요 기사로 나왔다. “학생 좌경화가 심각하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박홍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총장들이 박수로 환영했다는 스케치 기사도 3면에 실렸다.

같은 날짜 사설(「대학인과 주사파」)은 교수들에게 아래와 같은 ‘격려의 말’을 보냈다.

이제는 교수들이 더 이상 학생운동권의 눈치를 보거나 그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이유와 필요가 없어졌다. 학생운동권은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란 뿌리를 공유하는 이른바 민주좌파가 아니라, 도덕성마저 상실한 구닥다리 친북 주사파일 뿐이다. 그러니 교수들은 보수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개혁주의자든 이제부터는 각자의 스펙트럼에서 당당히 공동의 이단인 주체사상 맹종파만은 결연히 지탄하고 척결해 주었으면 한다. 주사파의 존재는 진정 진보의 수치이자 대학의 수치 아닌가.

조선일보의 7월 25일자 사설(「민주당의 신 공안론」)은 주사파 공격의 ‘ 압권’이었다. 온 나라가 ‘공안’으로 전전긍긍하는데, 조선일보는 민주당이 “신 공안정국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로 보인다”며 양비론을 펼친다고 나무라면서 “주사파를 비롯한 친북세력이 스스로 그러함을 자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증거가 따로 필요하다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제는 아예 증거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강변을 편 것이다.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과 정권의 비호 아래 박홍의 ‘증거가 필요 없는 주사파’ 몰이는 꼬리가 길기도 했다. 8월 25일 그는 전현직 방송인들의 모임인 여의도클럽 주최 토론회에서 “87년부터 7년 동안 대학이 배출한 주사파를 1만5천명에서 3만명 정도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며 “이 학생들이 졸업 후 언론·교육·사회봉사계 등에 진출하고 특히 정계로 많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생회장이 주사파면 통상적으로 간부들도 주사파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는 그 기간에 총학생회장을 맡은 5백51명과 부회장 등을 합치고 학교별로 20~30명씩 잡아 나온 숫자”라고 ‘폭로’를 계속했다. 조선일보가 그 다음 날짜 1면 머리에 「박홍 총장, 주사파 1만5천명 추정 / “정치·언론·교육계 진출 / 범민련 협박편지 등 공개 / 대학생 아버지가 쓴 책 읽다 눈물 대독 부탁」이라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음은 물론이다.

1면뿐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 박홍과의 일문일답을 2면에, 발언 요지를 3면에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 기자가 “주사파와 사노맹 관계 발언을 보면 박 총장이 주사파를 정확하게 아는지 의심스럽다. 발언 이후 문제가 확대되자 기존의 발언을 거의 모두 번복하다시피 한 것으로 보도됐는데…”라고 질문하자 박홍은 “주사파와 사노맹이 다른 것을 누가 모르나. 다만 남한을 적화통일 한다는 목표는 같다. 독사나 살모사나 마찬가지다. 사노맹의 강령을 보면 명백히 나와 있다. 내가 말했듯이 주사파 뒤에 사노맹, 사노맹 뒤에 사로청, 사로청 뒤에 김정일이 있다. 아니면 누가 뒤에 있나. 하나님이 있나, 부처님이 있나? 내가 번복했다니. 일부 언론이 내 발언을 왜곡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신 공안정국 신 매카시즘이 박 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등장했다. 서강대 학생들의 총장 퇴진 요구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질문에는 “똥파리 소리라 무시한다”고도 했고 “박 총장의 발언은 허수아비를 놓고 호랑이인양 야단법석을 떤 꼴이 아닌가. 증거를 분명히 제시하면 발언의 생명력을 돋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충고에 대해서는 “답답하다. 증거를 대지 않았나. 어제 월간조선 9월호를 읽었다. 남한의 주사파 조직에 대한 북한 당국의 지령문 내용을 보라. 이런 것이 증거가 아니고 뭔가”라고 강변했다.

여전히 직접적 증거 제시가 없는 일방적 주장이었다. 조선일보는 다음 날인 27일자 사설(「그래도 지구는 둥글다」)을 통해 박홍을 극력 비호했다.

(…)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둘러싼 저간의 사태는 사람 많은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도둑을 조심하라고 소리쳤더니 몇 사람이 그에게 누가 도둑이며 그 증거는 무엇인지 대라고 윽박지르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 주사파는 김일성주의자들로, 폭력적 방법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을 신념으로 하는 집단이다. 우리 체제를 지키려는 사람이라면 그런 집단이 우리 남쪽 안에 존재한다는 경고를 굳이 윽박지르며 증거를 대라고 몰아세우는 형국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어째서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말이다.
(…) 만일 박 총장이 구체적인 이름을 거명했다고 한다면 그 때는 특정인의 인신에 관한 일이어서 그 증거를 대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의 발언이 단순히 그 존재와 규모와 방법과 실상에 언급하고 있는 한, 구체적 피의자는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계속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박 총장의 신뢰도를 먹칠해서 결국 그의 주사파 발언을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그의 발언으로 피해를 입거나 주사파를 비호할 입장에 있는 사람인 것으로 오해될 소지마저 없지 않다.
문제는 아무리 박 총장의 입을 다물게 해도 우리 내부에 주사파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지울 수는 없는 점이다. 갈릴레오가 아무리 입을 다물어도 지구는 둥글다는 이치를 꺾을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박홍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진심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우리 체제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지키려는 충정과 젊은 학생에 대한 애정이며,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는 주사파에 대응해서 우리 체제를 지켜나가는데 있다.

이 사설의 ‘논지’는 막무가내요, 적반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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